책소개
이 책에 수록된 여덟 편의 작품은 타이완국립제남대학의 황진수 교수와 타이완국립중산대학의 장진중 교수가 함께 고른 말레이시아를 대표하는 단편소설이다. 말레이시아 소설선에서 종종 등장하는 ‘화인’은 세대 구분, 국적의 유지 또는 변경 여부 등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개념으로, 주로 중국 대륙 이외의 지역, 즉 타이완·홍콩·마카오·싱가포르·말레이시아 등지의 중국계 사람들을 통칭한다. 화교가 주로 이주와 이민에 따른 1세대를 가리키고, 고유한 문화를 최소한의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현지에 동화되거나 혼혈로 새로운 인종의 형태를 구성하는 중국계 이주민의 후손을 ‘화예(華裔)’라는 용어로 설명하는데, 이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 개념이 ‘화인’이다.
황진수의 <물고기 뼈>의 주인공은 어려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진 큰형에 대한 과거의 기억을 안고 사는 대학 교수다. 그는 현재 갑골문을 연구하지만 한편 개인적으로 매우 기이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독립 시기 거주 화인들의 불안한 신분적 정체성에 대한 묘사, 소설의 곳곳에서 등장하는 중국이라는 문화적 상상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문화적 혼종을 경험한 체험적 고백을 작품 속에 잘 녹여 냈으며 고대 문학에 대한 관심과 문자학에 대한 학식을 잘 어우러지게 하여 정밀한 구성과 놀라운 복선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나는 한 그루 빈랑나무>는 단 한 번의 선택으로 40여 년이 넘는 세월을 밀림을 떠돌며 살아가게 될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공산 게릴라 활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실제 게릴라 부대원으로서의 삶을 살았던 작가 허진은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실제 게릴라 부대원들의 인생을 사실적으로 보여 준다.
량팡의 <슬레이트 지붕 위의 달빛>은 어려서 다녔던 학교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어린 학생의 시선에서 보이는 역사적, 사회적 잔인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작품으로, 과거 말라야공산당 활동에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교사의 참혹한 죽음에 대해 말한다.
<청교도>는 말레이시아에서 나고 자란 작가 원샹잉의 성장 과정과 거의 일치하는 듯한 주인공 화화쯔의 젊은 시절을 다룬다. 중국 남부 지역에서 평범한 백성으로 소박하게 살았던 조부모와 부모 세대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머나먼 남쪽의 타국까지 밀려오게 되었고, 주류 국민이 아닌 입장에서 새로운 정착지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후손들을 어떻게 교육하고자 했으며, 그 후손들은 어떤 세월을 살아야 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망향>은 일본 제국주의 시절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내용이다. 어린 시절 동네의 버려진 황무지 근처에서 살았던 ‘타이완 아가씨들’과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어린 화교 소년이 더 이상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고 여자로서도 살 수 없게 된 그녀들에게 인간다운 관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주었지만, 결정적인 철없는 행동으로 인해 평생 떨쳐 버릴 수 없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는 내용을 담았다.
상완쥔의 <땅 위의 물고기, 시험지의 새>의 주인공은 공부보다 노는 것이 더 좋은 학생이다. 또래가 가진 게임기를 부러워하고 자신이 아끼는 몇 가지 물건들을 소중한 보물로 여기며 종종 숙제를 잊어먹고 학교에서 벌서는 아주 평범한 아이다. 아빠는 줄곧 아이를 혼내지만 외조부만은 마음을 헤아려 주는 듯하다. 친엄마인지 알 듯 모를 듯한 커피점 여자에게 다녀온 뒤로 아이의 마음에는 다시 그곳에 가고 싶은 생각이 생겨나게 된다.
<포위된 성으로 진격>의 주인공 양공은 전형적인 중국 사대부의 화신으로, 실속 없는 체면치레를 중시하고 박학다식한 교양의 유무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인물이다. 소설은 이러한 인물이 그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 기타니 우타로와 ‘최후의 바둑’을 두면서 겪게 되는 심정의 변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허수팡의 <다시 꺼내지 말자>는 죽기 전 이슬람교로 개종한 한 화인의 유족들이 장례식장에서 겪었던 일을 아이의 시선으로 설명하면서 이 모든 과거의 일들이 어른이 된 지금까지 모든 가족들에게 충격적이었던 어떤 사건으로 기억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슬람교의 일부다처제와 회교도식 장례 문화에 대한 약간의 궁금증도 해소할 수 있다.
200자평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중국계 작가들의 선집. 말레이시아의 독립 시기에 거주하던 화인들의 불안한 신분적 정체성에 대한 묘사가 드러나는 <물고기 뼈>, 단 한 번의 선택으로 40년이 넘는 세월 공산 게릴라 활동으로 밀림을 떠돌며 살아가게 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나는 한 그루 빈랑나무>, 과거 말라야공산당 활동에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교사의 참혹한 죽음을 어린 학생의 시선에서 그린 <슬레이트 지붕 위의 달빛>, 어린 시절 동네에서 과거 군 위안부였던 아가씨들과 친분을 갖게 된 화교 소년이 철없는 행동으로 인해 평생 떨쳐 버릴 수 없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는 내용의 <망향> 등 단편 8편이 실렸다.
지은이
황진수(黃錦樹, 1967∼현재)
말레이시아 조호르 출신으로 타이완 저명 마화 작가이자 평론가다. 1986년 타이완으로 유학을 떠나서 타이완대학(臺灣大學)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단장대학(淡江大學)에서 중문학 석사, 국립칭화대학(國立淸華大學) 중문학과에서 박사를 했고 현재 국립제남국제대학에서 교수로 있다. 제18회 중국시보(時報)문학상 소설 대상을 받았고, 제7회 연합문학신인상에서 추천상을 받았다.
허진(賀巾, 1935∼현재)
싱가포르 출생으로 본명은 린진취안(林金泉)이다. 1950년대부터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 인도네시아를 전전할 때부터 창작이 중단되었으며, 1980년대 말 밀림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기까지 공산당 게릴라 부대에서 생활했다. 태국 남쪽에 정착한 이후 다시 창작을 시작해 1990년대에 오랜 게릴라 생활을 담은 ≪혹독한 세월(崢嶸歲月)≫을 발표했으며, 2004년에는 1950년대 싱가포르 학생운동을 배경으로 한 ≪거대한 물결(巨浪)≫을, 2010년에는 싱가포르·인도네시아·태국을 떠돌았던 인생을 기반으로 한 ≪유랑(流亡)≫을 발표했다.
량팡(梁放, 1953∼현재)
말레이시아 사라왁에서 태어났으며 영국에서 공학 학사, 스코틀랜드에서 토양역학 석사를 하고 현재 사라왁의 수리관개국 토목 엔지니어이자 ‘사라왁화문작가협회’의 이사를 맡고 있다. 그의 작품은 여러 차례 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 ‘세계중문소설선’에 소설 <마라아달(媽拉阿妲)>로 상을 받았다. 수필로 <따뜻한 재(暖灰)>, <오랜 비(舊雨)>, <책 읽는 날(讀書天)> 등이 있으며 농후한 휴머니즘적 색채와 역동적인 생명력을 표현했다고 평가받는다.
원샹잉(溫祥英, 1940∼현재)
말레이시아 페락 주 타이핑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원궈성(溫國生)이다. 1965년 말레이시아 대학에서 문학 및 교육학 학사로 졸업했다. 졸업 후 교직에 종사하면서 1974년에 중문 단편소설 11편 모음집 ≪원샹잉 단편(溫祥英短篇)≫을 발표했고, 오랜 공백기를 거쳐 수필집 ≪반한문집(半閒文集)≫, 단편소설집 ≪자화상(自畵像)≫, ≪청교도(淸敎徒)≫를 발표했다.
리융핑(李永平, 1947∼현재)
말레이시아 북부 보르네오 섬 사라왁 출생이다. 중학 과정을 마친 뒤 1967년 타이완으로 와서 타이완 대학 외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문학 잡지 ≪중외문학(中外文學)≫ 편집 일을 하면서 타이완으로 귀화했다. 미국 워싱턴대학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여러 대학에 재직하면서 창작과 번역을 겸하다가 현재 퇴직했다. 대표작 ≪지링의 연대기≫는 세계적인 화교 시사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에서 선정한 ‘20세기 중국 대표소설 100선’ 중 하나로, ≪대하의 끝에서(大河盡頭)≫ 상권은 2008년 ≪스바오(時報)≫가 선정한 ‘10대 좋은 책’ 중 하나로 선정되었고, 2010년에는 제3회 홍루몽(紅樓夢) 문학상(세계 화문 장편소설상)을 수상했다.
상완쥔(商晩筠, 1952∼1995)
본명이 황뤼뤼(黃綠綠)다. 말레이시아 켄다에서 출생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창작을 시작해 첫 번째 소설 <비밀(秘密)>을 말레이시아의 유일한 순문학 잡지 ≪자오펑(焦風)≫에 기고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77년 여름 타이완대학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첫 번째 단편소설집 ≪백치녀 아롄(癡女阿蓮)≫을 발표했다. 이후 말레이시아로 돌아가서 소설 ≪적막한 거리(寂寞的街道)≫를 발표해 ‘왕왕차이청년문학상(王望才靑年文學賞)’을 받았다. 1982년 소설 ≪간정(簡政)≫으로 말레이시아작가와 잡지연합협회의 단편소설 우수상을 받았다.
장구이싱(張貴興, 1956∼현재)
말레이시아 북부 보르네오 섬 사라왁 출생이다. 1976년 타이완으로 건너와 타이완사범대학(臺灣師範大學) 영문과를 졸업하고,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 1982년 타이완으로 귀화했다. 1978년 ≪협영록(俠影錄)≫으로 제1기 시보문학상 소설 부문 장려상을 받아 타이완 문단에 데뷔했으며, 1979년에는 ≪호랑이 무찌르기(伏虎)≫로 제2기 시보문학상 소설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1990년대 이후, 말레이시아 보르네오의 유년 시절을 창작의 기반으로 삼아 ≪세이렌의 노래(賽蓮之歌)≫, ≪말썽쟁이 가족(頑皮家族)≫, ≪코끼리 떼(群象)≫, ≪원숭이 잔(猴杯)≫, ≪나의 사랑하는 잠자는 남국의 공주(我思念的長眠中的南國公主)≫ 등을 발표했다.
허수팡(賀淑芳, 1970∼현재)
말레이시아 케다 출신이다. 타이완 정치대학(政治大學) 중문학과에서 석사를 했다. 엔지니어, 기자로 활동했고, 라만대만(拉曼大學)에서 강의한 바 있다. 현재 난양이공대학 중문학과에서 박사과정에 있다. 대표 소설집으로는 ≪미궁양탄자(迷宮毯子)≫(2012)가 있다.
옮긴이
고운선
부산대학교에서 한문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 석사 과정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중국 현대 작가 저우쭤런(周作人)에 대한 논문 <周作人 散文에 나타난 문학 담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20세기 초반 동·서양 지식 교류의 역사 및 세계사적 지식 담론의 보급과 유통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근대 시기 동아시아의 지식 담론이 어떤 원류를 거쳐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20세기 초반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중심 역할을 했던 중국의 각종 문예 잡지에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당시의 중국 작가들이 번역·출판했던 외국 작가들의 작품 번역본과 여기에서 관찰되는 문화적 길항작용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 중이다. 논문으로는 <현대 중국 사회 納妾의 과도기적 양상>, <1960∼1970년대 王禎和의 초기 단편소설 연구>, <저널리스트 林語堂 初探: 저널식 글쓰기와 간행물 발행의 관계를 중심으로>, <주작인(周作人)의 루키아노스(Lukianos) 대화집 번역의 의의>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타이완 작가 중리허(鍾理和)의 ≪원향인(原鄕人)≫(2011)과 왕전허(王禎和)의 ≪혼수로 받은 수레(嫁粧一牛車)≫(2012)가 있다.
고혜림
부산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중국 현대문학으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부산대학교 현대중국문화연구실 소속 연구원으로 중국 문학 번역 작업 및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중국의 현대 문학과 화인화문문학, 화인 디아스포라문학과 세계 문화, 세계 문학과 화인문학 작가들의 정체성 문제다. 또한 페미니즘, 포스트식민주의와 관련한 여러 가지 문학 쟁점, 문학과 영화의 관계, 이종 문화간 충돌과 결합 등에 관한 지속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
역자의 대표적인 글로는 <북미 화인화문문학에 나타난 디아스포라문학의 특징>(2013)이 있으며 기타 학술논문으로 <張系國의 소설 ≪장기왕(棋王)≫과 ≪바나나수송선(香蕉船)≫에 나타난 화인 디아스포라의 정체성>, <북미 화인화문문학의 역사와 시기구분> 등이 있으며, 번역 논문으로 천궈추(陳國球)의 <≪홍콩문학대계 1919∼1949≫ 서문>과 예웨이롄(葉維廉)의 <타이완, 홍콩 모더니즘 시의 역사적 지위>, 량빙쥔(梁秉鈞)의 <1950년대 홍콩 영화를 통해 본 5·4전통의 계승과 변화의 홍콩 문화 읽기> 등이 있다. 역서로는 부산대학교 김혜준 교수 외 4인이 공동 번역한 홍콩 여류 작가 단편소설 모음 ≪사람을 찾습니다≫(2006), ≪장기왕(棋王)≫(2011), ≪다시 종려나무를 보다(又見棕櫚又見棕櫚)≫(2013) 등이 있다.
차례
한국어판 서문
물고기 뼈
나는 한 그루 빈랑나무
슬레이트 지붕 위의 달빛
청교도
망향
땅 위의 물고기, 시험지의 새
포위된 성으로 진격
다시 꺼내지 말자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이 타이완 아가씨들은 어째서 타이완으로 돌아가지 않았나요?
−나도 웨롼 이모한테 물어본 적 있어. 그녀가 말하길….
−그녀가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 주던가요? 우물쭈물 말을 더듬지 말고요, 급해 죽겠네!
−그녀가 그랬어. 이제는 자궁이 파열되고 못쓰게 되어 영원히 아이를 낳지 못할 거라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친척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말을 하면서 바로 주르륵 눈물을 흘렸는데, 소매를 당겨 올려 팔뚝을 드러내고는, 햇빛 아래로 뻗어서 나에게 팔뚝에 새겨진 검은 글자 하나를 보여 줬어.
−나는 뭔지 감이 안 잡혀요.
−‘위(慰)’ 자 말이야.
−위안부라고 할 때 그 ‘위’ 자 말인가요? 아, 이제 알겠어요.
−이 문신은 평생 그녀들의 몸에 남아서 영원히 씻어 내 버릴 수도 없었어! 웨롼 네 자매는 마치 고대 중국의 죄인처럼 얼굴에 글자가 새겨지는 묵형을 당한 것과 같아서, 어디를 가든지 간에 모든 사람들이 그녀들이 했던 일을 알아챘지. …
<망향>, 223~225쪽